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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by JOSH.CHO 2025.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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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움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아름다움일까?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움 자체를 의미하고, 무엇이 아름다움이란 사물과 같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즉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아름다움 것 그 자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저녁 무렵 아름답게 노을 지는 하늘,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같은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아름다움 자체에 관해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아름다움이란 다양하다.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과 타인이 느끼는 아름다움의 다름에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모나리자라는 여인이 가장 아름다워 보일 수 있으나, 누군가에게는 모나리자라는 여인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름답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상황과 조건 누군가의 시선에 따라 다르게 판단된다면, 그것을 우리는 아름다움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일까? 그저 완전한 아름다움을 서투르게 모방한 것이지 않을까? 그럼 완전한 아름다움은 또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아름답다는 개념은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다. 즐겁게 해 주는 것, 감탄을 주는 것 모두 아름다움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직업, 법률, 국가에서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였으며, 플라톤은 미의 개념을 도덕적, 인지적 차원에도 적용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은 아름다움을 '시각과 청각에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정의하기도 하였다. 아름다움의 개념을 감각적 대상에 국한하여 좁은 의미로 적용한 본격적 시기는 고대 말기 스토아주의자들이 활동하던 때부터였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이 수라고 주장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무한 앞에서 신성한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 현실의 경계를 정하고 질서를 부정하며,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규칙을 추가했다. 그 수단이 바로 수였다. 피타고라스 학파들은 우주의 화합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아름다움이라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질서와 비례는 아름다운 것이고 적합한 것'이며, '수 때문에 모든 사물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라고 보았다.

 고전기 그리스에서는 탁월함의 구체적 표상을 정신과 육체가 완전히 조화된 인간에게서 발견하였다. 그들의 미적 이상은 조화, 균제, 질서이다. 고대 조각품들은 이러한 조화와 균제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인들은 추상적인 규범보다 시각적인 즐거움을 중시하였다. 그들은 조각상과 건축물을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가장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리스인들도 물론 객관성을 존중하긴 하였다. 하지만 실제 현실을 적절히 표현하는 객관성을 존중할 뿐이었다. 그들은 규칙과 실제 사이의 적절한 조화를 중요시하였다. 플라톤은 감각적 세계의 아름다움보다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추구하였다. 플라톤은 구체적 대상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아름다움을 구분하였다. 플라톤에게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현상계가 아니라 본질의 세계, 즉 이데아계에 속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지금의 예술가들은 진실을 외면한 채 실제의 비례가 아니라 아름다워 보이게 할 비례를 형상으로 재생해 낸다. 그러므로 진짜 같다고 해서 최고의 작품이라고 부르는 건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플라톤은 완전한 이념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불완전한 감각적 미와 엄격히 구분하였다. 그리고 예술이란 실재의 가상으로서 실재에 대한 참된 인식을 방해하는 것으로 비판받는다.

 중세 미학에서 중세인들은 사물의 정밀한 재현에 무관심하였다. 중세의 예술적 관심사는 물질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영적세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영적세계는 물질계와 다른 차원에 존재하기 때문에 표현 방식도 상이했다. 중세인들은 모든 사물의 표현 밑에는 초자연적 의미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세계는 하느님의 손으로 쓰인 책 같다고 믿었다. 세상의 사물은 신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믿었다. 세계에 숨겨진 의미를 보이게끔 드러내는 것이 중세의 예술이었다. 중세 예술의 미학은 플로티노스에서 유래한 '빛의 상징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플로티노스에게 아름다움이란 일자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중세는 일자를 신으로 대체하였으며, 일자의 빛을 신의 은총으로 간주하였다.

 르네상스의 미학에서 사물의 재현이라는 정신에 의해 추구된 예술은 르네상스 회화가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 회화는 색이나 빛의 표현이 아니라 형태의 재현에 몰두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모방을 벗어나 초감각적 실체를 인식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르네상스 화가들은 자연을 단순히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 아름다움을 재현하고자 했다. 그들에게 예술작품은 이상적 미의 예시, 즉 미적 가상이었다.

 현대 예술가들은 자연 속 아름다움과 같은 전통에 도전하는 시도를 해 왔다. 하지만 모더니스트들의 반항적 시도를 비판하는 시선들도 있었다. 비판가들이 보기엔 모더니스트들의 시도는 자연의 모습을 이상화시켜 재현하는 예술적 움직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중심의 상실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가들은 현대 예술가들을 막지 못하였다. 19세기 말부터 전개되었던 전통적 형상, 색채 등에 대한 도전은 세월이 지날수록 거세졌다. 추상예술은 더 이상 재현적 이미지를 가지고 바깥의 대상을 지시하려 하지 않는다. 대상의 재현이 아닌 그것에서 자립한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 추상미술이 추구하는 기본 정신이다. 그래서 추상미술은 형태의 단순화를 통해 재현을 포기한다. 추상미술은 입체감을 살리고, 공간성을 제거한다. 20세기 전반부터 미술은 무의식의 탐구와 같은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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