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후의 현대사회를 우리는 흔히 다원주의 사회라고 하고, 현대를 다원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다원주의 사회란 한 사회 안에서 다양한 가치가 서로 대등하고 자유롭게 공존하며 경쟁을 펼치는 사회를 의미한다. 처음 다원주의는 개인의 정치적 권리의 보장을 위한 요구에서 등장하였다. 다양성의 보장은 사회구성원들과 여러 집단이 다른 구성원들에 대한 관용과 인정의 태도를 유지할 때 가능해진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인정은 자신의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수용되고, 자신이 타인의 관심 안에 존재함을 확인하게 하는 단서이다. 즉 인정의 욕구이다. 철학에서 인정의 문제가 주요한 개념으로 부각된 것은 독일의 철학자 헤겔에 의해서이다. 헤겔은 타자를 자아로서 의식하지 않는 한, 인간은 스스로를 자아로서 충분히 자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즉 다른 사람의 자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인식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헤겔에 따르면 인정 과정은 생사를 건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인정의 문제는 인간이 문명과 사회를 이루면서 함께 등장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왜 헤겔에 이르러서야 이 문제가 화두에 오른 것일까? 근대 이전에도 인정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중요한 근거였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이전의 철학자들에게 인정은 모든 사람들의 삶의 문제로 여겨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신분제 사회에서는 노예 등의 존재는 귀족의 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인정의 문제는 적어도 같은 신분 안에서의 문제에 그칠 뿐이었다. 신분제 사회에서의 명예와 존경은 귀족과 같은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게만 돌아갈 수 있는 몫이었다. 따라서 이런 시기의 인정 투쟁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에서 돌출되기보다 일반적으로 계급적인 저항이나 신분격차에 의한 충돌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낮은 계층의 신분에 의한 저항은 인정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정을 위해서는 적어도 타자가 나를 인정하는 것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그 타자가 나와 대등한 존재 이상이어야 한다. 따라서 인정의 문제가 개개인의 생존과 구체적으로 결부된 역사적 조건은 근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인정의 문제가 복잡해지고 있다. 개인은 그가 맺고 있는 다양한 인간관계에 따라서 정체성이 형성되기 때문에 인정의 양상 역시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무엇보다 인정은 상호적인 과정이어야 한다. 다원주의는 바로 이러한 인정의 기초 위에서 논의될 수 있다. 다원주의는 세계에 대한 상대주의적 관점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는데, 복잡성의 증가는 하나의 단일하고 보편적인 기준으로 사회 각 영역의 갈등을 해결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차원의 요구를 넘어서 있다. 다원주의 논란의 뜨거운 감자는 종교영역이다. 종교다원주의는 특정한 하나의 종교만을 특수하고 유일한 종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교들이 주장하는 진리관을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상대적이며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동일시하는 기본 명제를 전제로 한다. 종교다원주의는 특정한 종교를 믿는 사람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이지만, 한 사회 안에서 종교로 인한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중립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문화다원주의에 대해서도 많이 논의되고 있다. 문화다원주의는 다문화주의라고도 한다. 모든 문화는 각자 독특하고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다원주의를 정치적 차원에서 다루든 종교적, 문화적 차원에서 다루든 중요한 점은 현대 국가들이 대부분 다문화사회라는 점이다. 다문화사회란 한 국가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다양한 종교, 문화, 교육, 인종, 민족, 언어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회라는 점이다. 우리나라 역시 산업화와 세계화를 거치면서 단일민족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다문화사회의 특성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다문화사회에서의 갈등은 다른 문화에 대한 인정만으로 예방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 사회에서의 인종 갈등이 단순히 인종의 차이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차이, 사회적 지위의 차이, 교육 수준과 복지의 문제 등과 연관된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듯이 다문화사회의 갈등은 사회 전 영역에 걸친 갈등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섣불리 동화정책을 취하기도 어려운 문제이다. 마이클 왈저는 다문화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가치다원주의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가치다원주의의 관점은 분배는 경제적인 가치만이 아니라 명예, 지위, 공직, 권리 등 모든 가치에 적용되어야 하는 문제임을 부각시킨다. 어떤 한 사람에게 경제적인 것만이 항상 적당한 보상이라고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왈저는 사회구성원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인정하는 권리개념의 근거로 성원권이라는 권리를 제시하였다. 성원권은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든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누려야 할 모든 권한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권리이다. 이런 권리가 개인의 능력이나 고유한 특성 등에 의해서 훼손되어서는 안 되며, 만약에 누군가 그가 속한 사회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고,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고 하더라고 성원권의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왈처의 입장이다. 따라서 복지, 의료서비스,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어떠한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되며, 경제력과 같이 개인적인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 대해서는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의 공적 부조에 의해 성원권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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