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사회는 반드시 밝은 면만 지닌 것은 아니다. 앞선 게시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감시와 통제 그리고 안전에 대한 문제가 있다. 이러한 문제는 작은 사건에서부터 큰 사건까지 다양한 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사실 국민에 대한 국가기관의 감시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근대 이후 개인의 사생활과 사적 권리의 보호를 핵심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정치 문화에 기초한 국민국가가 건립된 이후 국가기관의 감시는 금기시되어 왔다. 하지만 권력자들의 감시욕은 줄어들지 않았다. 자유주의 국가의 등장 이후에도 감시는 파놉티콘적 형태로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파놉티콘이란 어디든 볼 수 있는 장소라는 뜻을 가진 감옥 혹은 보호시설을 의미한다. 파놉티콘은 원형건물의 감옥시설이다. 파놉티콘에 갇힌 수용자들은 속이 보이지 않는 중앙탑에서 누군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이 수용자들은 언제 어디서 지켜보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감시자의 시선을 항상 의식하면서 생활하게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수용자 스스로 자기의 사고방식과 신체의 움직임을 알아서 감시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감시자의 시선이 바로 내면화되는 것이다. 푸코는 파놉티콘을 근대사회의 지배 양식을 상징하는 모델로 삼았다. 그가 보기에 근대인들은 파놉티콘적 상황에 노출되어 스스로를 감시하면서 살아간다. 근대인들이 오늘날의 문명화된 행동거지를 갖게 된 것도 내면화된 감시 탓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 출신의 디디에 비고는 푸코의 파놉티콘 개념을 활용하여 바놉티콘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제안하였다. 디디에 비고는 현대사회의 감시 양태가 사회 외부로 추방되고 배제되는 사람들을 분류하고 감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깨닫고 이러한 현상을 바놉티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현대는 안전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고 있다. 사람들은 마약, 노숙, 난민, 실업 등의 위협에 상시 노출되어 있다고 불안해하는 것이다. 불안이 갈수록 커지자 전 세계 곳곳에서 경찰, 경비대 등과 같은 불안 관리자들의 연합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의하면 바놉티콘은 예전의 감시 철학 및 파놉티콘의 과업이 이제 정상사회에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게 만드는 과업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의 정신에 어긋나는 이러한 조치가 많은 민주국가에서 제도화되고 그 국민들이 바놉티콘의 제도에 호응하는 까닭은 공포에 대한 우려와 안전 지상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푸코의 파놉티콘 이론은 현대 정보사회의 어두운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파놉티콘적 감시는 기업의 마케팅 서비스 과정에서 출발함으로써 거부감을 낮추고 있다. 기업은 소비자들의 구매 목록을 빠짐없이 수집하여 개별화되고 차별화된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한다. 소비자들 개개인의 구매 정보는 신용카드 기록, 검색 기록 등을 통해서 모인다. 최근에는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의 '좋아요'를 통해서 소비성향, 윤리관, 정치관 등을 판단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소비자들은 이러한 서비스를 오히려 기대하고 신뢰함으로써 감시에 대해 기꺼이 순응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반대로 우리는 위와 같은 네트워크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자연스럽게 불특정 다수의 생각, 취미, 활동 등을 보게 된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는 이러한 활동을 감시로 자각하지 않게 하고 사교적 활동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심어둔다. 결국 모두가 서로를 엿보고 감시하고 있으니 국가기관이나 기업이 자신을 마음대로 조회한다고 해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또 정보사회에서 발생하는 인간관계의 문제로 의사소통의 부재가 발생한다. 현대사회는 지식을 정보로 변환시켜 유통하는 기술이 체계화되고 고도화되었다. 개별화된 전자기술 매체를 활용하면서 정보의 유통은 더욱 증가하였다. 가까운 예로 우리는 유튜브를 통해 세계 각국의 소식과 일상생활에 관한 정보를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다. 이처럼 현대인이 수행하는 의사소통의 양과 방식은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많다. 그러나 현대인은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느낌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어 한다. 이유는 정보의 교환과 지식의 의사소통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정보와 지식의 교통방식은 상이하다. 정보의 교환은 형식적으로 규격화된 지식을 주고받는 과정이다. 지식이 규격화되고 일반화된 형식의 정보가 되려면 지식이 지닌 불확실성의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즉 상이한 세계 이해 방식과 가치관에 의해 거부되거나 배제될 수 있는 요소들을 삭감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환을 통해 우리는 상이한 문화와 가치를 지닌 세계 각지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의사소통은 신속함과 용이성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사소통은 바로 이해를 목적으로 하기 떄문이다. 이해는 단순히 상대의 메시지를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이해는 상대방이 서 있는 세계에 대한 발견과 인식의 노력을 의미한다.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받아들였던 다양한 가치, 문화, 태도 등을 인식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낯선 세계관 사이의 비판적 만남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불일치와 불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즉 의사소통은 의사 불통을 동반한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이러한 의사 불통을 동반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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