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나 동물이나 모두 주어진 생존의 조건 속에서 문제를 안고 산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면 이런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대응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은 이런 문제에 대한 대응 방식이 다르다. 동물은 본능에 의존하지만 인간은 본능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삶의 보존과 향상을 위해 본능뿐만 아니라 생각과 궁리를 통해 문제에 대응한다. 대응을 통해서 생각하고 사고한 것들이 바로 지식이다. 지식은 인간 삶의 본질적 방편이다. 하지만 그릇된 지식은 삶의 문제에 대한 대응을 그르치기 마련이다. 결국 사람들은 참된 지식 일반의 근원, 근거, 과정, 범위 등 지식 자체에 대한 반성적 고찰도 수행한다. 이것이 곧 철학의 한 분야인 인식론의 문제의식이다. 인식론은 참된 인식이냐 아니냐에 구애됨이 없이 인간의 심리적 인지과정을 있는 그대로 분석 기술하고자 하는 경험, 사실 과학으로서 심리학과 구분된다. 동시에 인식론은 사고의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까지도 다룬다는 점에서 논리학과도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논리학은 추론의 형식적 절차상의 타당성만 따지므로 추론에 동원된 각 판단의 내용적 사실 여부까지 문제 삼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인식론의 진리란 무엇일까? 우선 대응설을 살펴보자. 대상과 판단, 실재와 관념, 사물과 지성이 서로 바르게 대응되었다는 측면에서 진리의 의미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대응설이라 한다. 대응설은 마치 거울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해서 모사설이라고도 한다. 모사설은 감각적 모사설과 이성적 모사설로 나뉜다. 감각적 모사설은 우리의 감각적 경험이 실재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반영하므로 감각적 경험에 반영된 대상에 대한 관념이 곧 그 대상에 대한 진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감각적 모사설은 상식의 토대는 되어도 보편적 진리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우선, 감각 자체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감각적인 모사 내용이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관념과 실재의 일치라는 감각적 모사설의 주장 자체가 성립되기 힘들다. 반대로 플라톤은 이성적 모사설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플라톤은 모든 사물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감각적 현상 배후에 참된 실재이자 본질로서 이데아가 있다고 주장하고 이성적 직관을 통해 그 이데아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대상에 대한 참된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성적 모사설 역시 문제점이 있다. 감각적 모사설과 달리 보편적인 이성 능력에 기초하여 진리의 보편성을 확보해 주지만 이성이 본질을 직관한다고 해서 직관적 인식의 결과가 곧 본질이라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그 직관의 내용이 사람마다 동일한 것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이성적 모사설은 비록 진리의 보편성을 확보해 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그 적용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정합설은 어떤 판단이 진리냐 아니냐를 판단과 실재의 대응 관계가 아닌 판단과 판단 간의 정합 관계로 판정하는 진리관이다. 즉 논리학을 이용하여 기성의 자명한 판단과 정합되면, 다시 말해 모순되지 않으면 진리이고 그렇지 않으면 허위이다. 이때 정합 여부, 모순 여부를 판단해 주는 것은 사고의 원리로서 모순율과 그에 기초한 연역의 규칙이다. 일반적으로 이미 알려진 하나의 판단이나 여러 개의 판단으로부터 다른 하나의 판단이나 여러 개의 판단이 필연적으로 도출될 때 앞에 있는 것에서 뒤에 있는 것으로서의 추리를 연역추리라고 한다. 삼단논법은 대표적인 연역추리의 방법이다. 정합설은 진리 판정의 보편성을 누구나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이성이 보장해 줌으로써 보편적 진리의 확고한 근거와 기준을 제공한다. 정합설적 진리관은 여러 지식들을 상호 모순 없이 체계화하는 기본적인 원리가 되면서 보편성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정합설 역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정합설은 어떤 판단의 진리성을 체계 내 상위 판단과의 정합 여부, 즉 상위 판단을 전제로 하고 그곳에서 새 판단이 논리적으로 연역되느나 되지 않느냐로 판정한다. 하지만 과연 그 체계의 최초 전제인 상위 판단은 무엇으로 진리성을 보장받는냐는 문제가 발생한다. 최상위 판단의 진리성을 확인할 수 없다면 그 판단의 하위 판단들 역시 모두 진리성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정합설 역시 최상위 판단이 진리임을 보장해 주는 정합설 이외의 다른 진리관을 추가로 요구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정합설의 한계는 경험과학적 체계일 경우, 감각적 모사설에 기초한 감각적 경험 사례들의 귀납적 일반화, 즉 귀납법의 도움을 받아 보완될 수 있다. 기하학이나 수학 같은 순수 이론 과학적 체계일 경우는 이성적 모사설에 기초한 명증적 직관과 연역법의 도움을 받는다. 이처럼 대응설과 정합설은 그것이 포함하는 귀납법과 연역법의 원리와 더불어 과학적 진리를 뒷받침하는 진리 이론으로서 상호 보완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칸트의 진리관은 근대 과학적 진리가 어떻게 객관성과 보편성을 갖는지를 해명하는 데 성공했지만, 물자체의 인식을 포기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러한 이성주의적 인식론에 대한 반동으로서 생철학 등 비합리주의 계열의 새로운 인식론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타 우리가 살펴보는 진리와 관련한 몇 가지 입장, 해석학, 조작주의, 실용주의적 진리관 등은 비록 현대 인식론 사상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오늘날 과학적 진리가 갖고 있는 본질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몇 가지 기초적인 시사를 던져 준다. 과학적 진리란 새로운 자료들의 발견과 귀납 그리고 연역에 의한 정합적 체계화를 통해 새로운 진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인간의 지성은 진리의 개방성을 통해 폐쇄적인 독단에서 벗어나 발전과 진보의 행보를 거듭해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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