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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랑이란 무엇일까? 에로스로서의 사랑

by JOSH.CHO 2025.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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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에게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일 것이다. 인류는 사랑의 위대한 힘에 기대어 인본주의적 인간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반대로 사랑은 위험하기도 하다. 사랑에 빠진 자의 맹목적인 열정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하기도 한다. 서양인들은 사랑을 크게 에로스, 아가페, 필리아로 나누어 해석하고 이해한다. 우리는 에로스로서의 사랑을 보고자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아마 대부분 에로스일 것이다. 에로스로서의 사랑을 들여다보기 전 먼저 사랑을 친숙하게 접해보자. 가장 유명한 사랑 영화라고 한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끝은 비록 비극이지만 남녀 간의 사랑의 열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시청자의 시각에서 볼 때 우리는 비극적 결말에 대한 공포를 생각하기보다 헌신적인 사랑의 맹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에로스는 사랑의 신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사랑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이기도 하다. 에로스의 본래 뜻은 특정 대상에 대해 품게 되는 성적 열정의 욕망을 의미한다. 에로스는 곧 자기의 결핍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욕망으로 볼 수 있다. 

 

 -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

 "본래 사람은 세 종류로 나뉘어 있었네. 남성과 남성, 남성과 여성, 여성과 여성이 한 몸에 붙어 네 개의 손발과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었지. 하나의 머리 위에 붙어 있는 두 개의 얼굴은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으면서 네 개의 손발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이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네. 그리고 힘이나 활력이 엄청나 자신들을 대단히 여겨 신들을 공격하기까지 했다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이야기한 내용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에서 사랑은 결핍에 대한 충족을 지향하는 열정이다. 본래 하나였던 인간이 서로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잃어버린 반쪽을 찾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는 열정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사랑이란 분리와 결핍의 고통에 대한 치유의 행위이다.

 

 - 바타유의 에로스

 바타유는 인간은 잃어버린 연속성에 대한 근원적 향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엄마 배 속에서 엄마와 한 몸이었던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혼자가 되며 고독하게 죽는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독립적인 지위와 위치를 점유하면서 각각의 인격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이는 곧 인간에게 원초적 불안과 합일과 연속에 대한 그리움을 품게 만든다. 바타유는 인간이 존재의 연속에 대한 향수로 인하여 단순한 생식 활동과는 다른 에로티즘이라는 문화적 양상을 탄생시켰다고 생각했다. 즉 상실한 합일에 대한 열정은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 만족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바타유가 지적했듯이 합일의 열망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존재이기 떄문이다.

 

 - 루크레티우스의 에로스

 루크레티우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갈망과 권태를 반복하는 사랑에 빠지지 말 것을 권하였다. 그는 성적 쾌락에 머무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 말에 성애가 선사하는 무분별한 쾌락에 몸을 맡기라는 이야기쯤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그는 어디까지나 에피쿠로스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주의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쾌락을 얻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고통의 부재 상태를 쾌락이라고 여겼다. 고통은 필수적인 것의 결핍에서 기인하는데, 이것을 채우게 되면 쾌락에 이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에피쿠로스주의자 관점에서 보면, 사랑의 열정에 빠진 사람들은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대상과 합일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러한 이유로 루크레티우스는 사랑의 열정으로 인해 동요하지 말고 현실적 삶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평정한 생활을 권고한다.

 

 - 플라톤의 에로스

 플라톤은 특정 인격 속에 제한되어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사랑의 욕망을 품었다. 플라톤에게 사랑은 헤어진 자신으로 상정된 대상을 찾으려는 열정이 아니라, 영혼의 완전한 상승을 위해 바쳐지는 열정이다. 이것이 바로 플라토닉 러브의 의미이다. 우리는 감각적 쾌락에 빠진 알키비아데스를 끌어내는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에로스는 특정 인격의 미에 대한 열정이 아닌 완전한 영혼, 아름다움 자체를 이루기 위한 자발적 노력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로 알키비아데스는 누군가의 지닌 미덕을 선사 받아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만들려 하였다. 겉으로는 정신의 완전성과 상대방에 대한 헌신을 추구하지만, 사실 그건 사랑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욕망을 뿌리로 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일 수 없다. 사랑의 관계란 아름다운 인간관계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사랑도 알키비아데스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맹목적 숭배는 자신을 비천하게 만들고 자아의 능동성과 독립성을 파괴한다. 그리고 어리석은 숭배는 사랑하는 연인을 생의 동반자가 아니라 오만한 지배자로 만들어 버리는 일을 초래할 것이다. 상대방은 이러한 자발적인 정신의 성숙을 함께하는 동반자이다. 그는 미덕이나 해답을 제공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정신의 모험을 계속하도록 촉구하는 자이다. 자기 연인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나와 그의 사랑 관계는 동등한 자유인의 관계가 될 것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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