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적 사랑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미덕을 갈망하는 욕구이다. 많은 사람은 소유의 욕구가 채워지면 상실의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사랑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에로스적 사랑의 갈망이 상실의 두려움으로 변질될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한 의심과 사랑의 대상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이는 통제와 폭력으로까지 진화되기도 한다. 이것은 잘못된 사랑 즉, 사이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인간관계 중 하나라고 하였다. 아름다운 인간관계는 서로를 독립된 인격으로 대우하면서 자유로운 인간적 실존을 이룩하도록 노력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사랑의 관계도 바로 이러한 노력 속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랑의 관계는 상대의 자유로운 실존을 억압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 우상숭배화
우리는 언제 한번은 우상숭배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그렇듯, 또는 사대주의 시대 때에서도 그렇듯 다양한 곳에서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우상숭배적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최고선을 간직하고 있는 우상으로 모시는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상이 되는 대신에 자신은 독립적 존재로서 살아갈 힘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우상은 실재하는 대상이 아닌, 자아가 만들어 낸 허상으로 볼 수 있다. 스스로가 가지지 못한 다양한 자질, 능력, 인품 등을 갖춘 자아상을 매력적인 대상에게 외화시켜 우상화시키는 형태에 불과하다. 이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일 것이다. 우상숭배적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또 다른 자신'에 대한 사랑을 순수한 헌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우상숭배한 대상이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우상숭배적 사랑에 빠진 사람은 실망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새로운 우상을 찾아간다. 우상숭배적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실존뿐만 아니라 상대의 실존까지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 비이기적 헌신
우리는 부모 품에서 자라면서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기의 못다 이룬 꿈을 자식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부모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자식을 지원하면서 실패한 자기 실존을 자식을 통해 실현하고자 한다. 그들은 헌신이라고 주장한다. 자식을 위해 살뿐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비이기적 헌신과 희생 속에서 자식은 사랑받고 있으며 행복하게 자라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이기적 헌신과 희생은 항상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독립적 기획에 따라 자기의 삶을 개척하지 못하여 끝내 실존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불행한 존재가 된다. 프롬은 아이들이 부모의 비뚤어진 헌신에 의해 양육될 때 '희생과 헌신'의 "덕이라는 가면 아래서 인생에 대한 혐오를 배운다"고 충고한다.
- 갈등 없는 사랑
대부분의 사람이 원하는 사랑은 갈등과 대립이 없는 조화와 협력이 완벽한 일치 상태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같은 생각, 같은 마음, 같은 의견, 같은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여긴다. 사랑과 갈등은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를 사랑이라고 보는 것은 환상이라고 프롬은 지적한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다. 인간은 실존하며, 자연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다. 인간은 분리의 부정적 상태를 극복하고자 사랑 속에서의 합일을 시도한다. 그러나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이다. 독립된 존재로서 사실성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각자는 저마다 입장, 견해가 다르다. 다른 존재들끼리 관계하면서 살아간다면 갈등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갈등의 어려움 때문에 사람의 합일을 원한다. 이렇게 보면 갈등은 우리를 사랑으로 이끄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갈등은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며, 상대방이 나와 독립된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상대방의 생각이 나와 다른 것은 내가 보지 못하는 점을 상대방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다른 시각은 내가 경험하고 있고 내가 알고 있었던 세상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 준다. 나와 다른 생각으로 갈등하고 있는 상대방의 존재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로 인해 나는 더욱 넓은 세상 속에 살게 되는 것이다. 서로의 편협한 관점을 고집함으로써 꽉 막혔던 관계는 상대가 발견한 세계에 대한 인정과 함께 또 다른 세계로의 상승을 경험하게 해준다. 여기서 우리는 갈등하는 사랑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 사랑과 자유
완전한 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각자 개인으로서 분리되어 있는 현대인의 처지를 생각해 볼 때 사랑에 대한 갈망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랑이 단순히 자신의 고독을 메꾸는 수단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동물을 애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각각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구실로 이러한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랑이 나와 상대방에 대한 구속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결코 아름다운 관계일 수 없다. 나와 너의 구분이 없는 일치와 합일은 모두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력으로 변질된다. 맹목적 합일을 추구하는 사랑이 아닌 서로의 자유로운 삶과 실존을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맺어지는 관계가 진정한 사랑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사랑을 시작해 보자. 참된 자유인으로서의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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